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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사   한국교회사  

한국기독교의 역사(개신교)
(출처 : 기독교대백과사전, 한국기독교100년사)

세계 교회사 (출처: 네이버 카페 <호주성산 역사신학 연구실> http://cafe.naver.com/historyth.cafe)
 
  세계교회사
 

1. 사도시대~사도 후 시대의 교회

가톨릭교회의 역사는 30년경 유다교의 축일인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베드로를 중심으로 군중 앞에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면서 구약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러한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이들이 사도들을 중심으로 사랑과 일치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는데, 초창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유대교 예배에 참여하였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유대교 종파 중의 하나로 보았다. 그러나 초대교회 신자들은 자신들만의 예배, 즉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를 거행하면서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사도단과 그들을 보좌하는 이들로 공동체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구세주로 고백하면서 그분의 기쁜 소식을 열심히 전하였으니,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루살렘 밖으로까지 전파되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이들을 그리스도교인이라 불렀다. 처음에는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전파되던 그리스도교는 차츰 그리스인, 로마인들에게도 전파되었으며, 사도들과 성 바울로와 다른 여러 제자들의 열성적인 선교활동 덕분에 로마제국 안에 있는 큰 도시들 대부분에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70년 예루살렘의 멸망 후에는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외국인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날로 커져 갔다.

이들 초기교회 공동체는 아직도 유대교의 전통을 어느 정도 따르면서도 나름대로의 교리와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사도들이 죽은 후, 2세기로 접어들면서 주교를 중심으로 하여 장로(사제)와 부제들이 보좌하는 지역공동체(교회)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들 공동체들은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교리문제를 해결하면서 급속도로 로마제국 안에 퍼지게 되었다. 교회가 발전하면서 로마 황제들과 잦은 마찰이 있게 되면서 2세기부터 4세기 초에 걸친 대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를 낳게 되었다.

2. 종교 자유 시대의 교회: 5대 교회의 형성

수많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발전을 거듭하던 교회는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밀라노에서 내린 칙령에 의해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이후로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 황제들의 호의적인 도움을 받으며 세계적 종교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마침내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29년에 포고령을 통해서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하였고, 이러한 국교시대를 맞이하여 그리스도교는 여러 분야에 걸쳐서 발전하게 된다. 이때 많은 수도원이 창설되어 영성에 대한 도움을 주었으며, 공의회가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조직으로 등장하였고 신앙생활의 활성화로 인하여 전례가 발전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밖의 교리 논쟁 등은 여러 공의회를 통하여 해결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정통 가톨릭 교리가 정립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당시 로마제국 안의 큰 도시들에 세워진 교회들은 훌륭한 주교들과 학자들의 영향으로 전례와 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주위의 작은 지방교회들은 이 큰 교회들로부터 전례와 신학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어느 일정한 지역 전체에 영향을 행사하는 큰 교회들이 생겨났으니, 이들 교회들을 총대주교좌(總大主敎座) 교회라고 불렀다. 5세기에 이들 총대주교좌 교회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 예루살렘에 있었다. 이들 교회들은 서로 협력하면서도 각자 서로 다른 역사를 걸어가면서 발전하였다. 로마를 제외한 다른 교회들로부터 파생된 교회를 우리는 현재 동방교회들이라고 일반적으로 부르고 있다.

3. 로마교회(서방교회)의 발전

5세기 중반기는 로마의 국경지대에 게르만족이 이동하면서 로마제국을 멸망시키자 그리스도교 자체도 붕괴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본래의 사명인 선교 열의를 잃지 않고 영국에 선교사를 파견함과 동시에, 프랑스와 독일 지역의 새 주인으로 등장한 게르만족을 개종시켰으니, 이로써 고대 그리스 문화권과 게르만 민족이 융합하여 새로운 중세문화를 탄생시켰고,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고유한 민족적 특성을 지니면서 같은 신앙 위에서 일치된 중세기 그리스도교의 기원이 된다.

4. 중세 전기의 교회(750∼1054년)

게르만 민족의 이동과 프랑크 왕국과 교황청의 융합이라는 과도기(450∼750년)를 거치면서 시작되는 중세기(750∼1300년)는 시대적으로 양분(兩分)될 수 있다.

중세 전기에는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서구 그리스도교 제국이 창설되었고 종교적 입장에서는 그리스도교 교세의 확장과 교황령(敎皇領)의 탄생 등, 외적 발전이 이룩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로부터 물질적인 혜택을 받은 반면에 황제의 내정간섭을 받아 교권이 약화되고 교회가 세속화 되었고,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가 밀착되었던 프랑크 제국이 정치적으로 붕괴됨으로써 교회의 권위와 교황의 권한이 쇠퇴하는 교회의 암흑기를 맞게 된다. 암흑기 동안에 그리스도교는 처음에 로마 귀족의 지배를 받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교회 내정간섭으로 자율성을 잃게 된다. 아울러 성화상 파괴 논쟁으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신학적 충돌을 하였고, 교리 논쟁 이후로 서방 라틴교회와 동방 비잔틴교회는 각기 다른 노선으로 발전하게 된다.

(1) 성화상 파괴 논쟁
동방교회들 안에서 5∼7세기에 대중 신심으로 크게 유행하였던 성화상 공경이 신도들을 우상숭배로 빠지게 할 염려가 있다 하여 성화상들을 파괴하는 운동이 100여 년 동안(726∼843년) 지속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제국 안에서 교회박해, 폭력사태, 정치적 혼란 등 사회소요가 야기되었다. 성화상 공경을 찬성하는 서방교회(로마교회)와 이를 금지하는 동방교회 사이에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843년 콘스탄티노플 교회회의에서 성화상 공경을 부활시킴으로써 성화상 논쟁이 끝났다.

(2)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결별(1054년)
남부 이탈리아에 위치한 교회의 영향력 행사를 둘러싸고 로마교회와 콘스탄티노플교회와의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1054년 서로를 파문하는 가운데 비극적으로 끝나고 말았으니, 이후 동·서방 교회는 1965년 서로의 파문을 철회하고 화해하기까지 결별상태에 있게 되었다.

5. 중세 후기 교회(1054∼1300년)

중세 후기에는 클뤼니 수도단체의 개혁과 그레고리오7세의 교회쇄신으로 교회는 세속권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권을 회복할 뿐 아니라 세속권을 지배하는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이러한 개혁운동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각성시켰고, 평신도의 영성강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는 11세기에 시작된 십자군운동과 청빈운동에서 나타난다. 십자군운동은, 이슬람교도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성지순례에 불편을 느끼고 있던 중,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1세가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서방교회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교황 우르바노2세는 1095년 두 차례의 종교회의에서 서방 그리스도교 국가에 이를 호소하였다. 이때 동방교회를 돕기 위한 염원과 이교도로부터 성지를 탈환하려는 열망은 국가란 장벽을 넘어 서구 세계를 단결시켰다. 이 십자군운동은 대중의 종교적 운동으로 시작되어 몇 세기 동안 8차례 (또는 4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십자군운동은 그리스도교적인 목적을 위하여 일어났지만 기사들의 모험심, 명예욕 등의 세속적 동기도 있었다. 그리고 기사들의 활력은 비그리스도교적인 광포로 나타나 십자군 운동을 중세의 한 잔인한 현상으로 변질시키기도 했다. 십자군운동으로 인해 기사 수도회가 탄생했으며 비잔틴 문화와 이슬람 문화와의 접촉이 가능했고, 학문, 특히 스콜라 철학과 신학, 예술의 발달에 이바지 한 점 등이 그 긍정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6. 종교개혁 전야(前夜)의 교회

14∼15세기(1300∼1500년)에 있어서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는 중앙집권의 정치체제 또는 지방분권화의 정치적 상황으로 단일성을 상실하였다. 또한 교회는 일련의 대사건 즉 교황청의 아비뇽 환도(遷都)와 대분규(大紛糾, 西歐의 大離敎)로 인한 교황권의 약화로 말미암아 공의회 우위사상의 흐름 속에서 이단 운동이 발생하여 혼란 속에 빠졌다.

프랑스인들이 교황으로 뽑히면서 그들이 프랑스의 아비뇽에 머무는 70여 년 동안(1305∼1377년) 교회는 중심을 잃고 크게 흔들렸으며, 교회 개혁 또한 지지부진하게 되었다. 로마로 다시 천도한 이후에 교회는 큰 위기를 맞게 되는데, 그것은 세 명의 교황이 선출됨으로써 서로가 자신을 정통 교황이라고 주장하게 되고 이로써 교회 전체가 분열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콘스탄스공의회(1414∼1417년)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렸고, 이로써 분규는 끝났으나 그 후유증은 오래 남았으니, 영성의 쇠퇴, 신학의 퇴보, 교회 쇄신 작업의 실패로 교회는 날로 흔들려 갔다.

한편 일반대중의 신심생활은 매우 활발하였으며 이는 수많은 성당의 건립, 자선활동, 신심서의 보급 확대, 모국어 성서의 번역, 새로운 신심의 번창에서 볼 수 있다(묵주 기도, 십자가의 길, 성지순례 등). 그러나 이 시대의 신심은 개인주의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고, 현세적 두려움을 피하고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치중하여 미신적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으로 교회 안에서는 비난과 함께 개혁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지기에 이른 것이다.

7.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의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의 수사신부이며 성서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는 대사(大赦) 남용에 대해 항의하면서 대사 교리의 재정립을 제의하기 위해 그의 교구장과 동료, 교수, 신부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에는 유명한 95개 조항의 신학명제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정통신앙의 뿌리를 뒤흔들어 놓았으며 그리스도교 교계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개신교)로 분열시키는 종교개혁 시대를 열게 되었다.

아우구스띠노회의 수사신부(修士神父)였던 루터는 대사(大赦) 남용에 충격을 받고, 그는 1517년 교회의 관습대로 그의 교구장과 독일의 대사 시행을 책임진 고위 성직자에게 항의하는 편지와 대사의 남용을 논박하는 신학명제인 '95개항 명제'를 작성하여 보냄으로써 대사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분열의 원인이 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개신교 기원을 루터의 종교개혁에 두고 있다면 그 시발점은 바로 이 대사논쟁(大赦論爭)이라고 할 수 있다. 루터는 사목자로서 설교를 통해 대사 교리와 구원론을 설명하면서 대사 설교가들을 비판, 신자들에게 대사 남용의 위험을 경고하였다. 그에 의하면 우리 영혼은 원죄로 인하여 완전히 부패하여 그 어떤 착한 행위도 우리 의지로 할 수 없으므로 스스로는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덕(功德)이 병풍과도 같이 인간의 죄를 덮어 주는 것이므로 오직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만 있다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고신극기(苦身克己), 종교계율의 엄수, 고해성사, 자선사업, 덕행 등이 구원의 조건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아무런 조건 없이 그리스도의 자비에 대한 신뢰만 필요하며, '우리를 구하는 것은 선행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수한 자비만이 우리를 구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성서만으로, 은총만으로, 신앙만으로 구원될 수 있다고 요약하였다.

이와 같이 루터의 종교개혁은 결국 루터의 파문과 함께 그리스도교 세계가 양분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프로테스탄트에서는 독일의 루터 종교개혁을 위시하여 스위스에서는 쯔빙글린의 종교개혁과 칼빈의 종교개혁, 그리고 재세례파의 급진적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영국에서는 국교회(성공회)가 탄생하였다.

8. 가톨릭 교회의 쇄신

가톨릭도 15세기 초부터 교회 쇄신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던 중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자극을 받아 교회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교회 쇄신을 바라는 사람들이 공의회의 개최를 요구함에 따라 1545년 트렌트에서 공의회(1545∼1563년)가 개최되었으니, 여기서 타락한 교회에 대해 반성하면서 신학과 교리를 재정리하고 교회 규율을 혁신하였다. 이 공의회는 종교개혁으로 혼란스러워진 가톨릭 교의를 명백히 하였고 교회 개혁을 추진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 공의회 이후에 가톨릭 교회는 교황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성립되면서 교황청을 중심으로 지방교회와 수도원에서 교회 쇄신이 일어났다. 트렌트 공의회의 개혁정신은 선교활동에서도 나타났는데, 종교개혁 이전까지 유럽의 종교로 머물러 있던 가톨릭 교회는 리베리아 반도의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신대륙 탐험을 통해서 세계 선교에 나선다. 그리하여 이제 가톨릭 교회는 동서양에 걸쳐 엄연히 존재하는 세계적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기에 들어서 유럽의 가톨릭 교회는 세계의 여러 나라로부터 정치, 종교, 사상에서 정면으로 도전을 받게 된다. 특히 국교회 사상과 가톨릭 정통 신학을 반대하는 이단 운동인 얀세니즘(Jansenism), 그리고 계몽주의 사상도 가톨릭 신학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9. 근대교회

1. 기독교의 아메리카 이민
서구의 식민지 개척에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참여했듯이, 다양한 유형의 유럽의 기독교가 아메리카에서 재생되었다. 그러나 독특한 형태의 기독교가 태동하여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북미에서는 많은 개신교 교파들이 유럽의 모교회들로부터 독립하면서, 기독교 전통의 “미국화”와 “캐나다화”가 드러났다. 스페인의 중남미 정복의 의미 있는 모습은 로마 카톨릭의 국교 화였다. 프란체스코회, 도미니쿠스회 및 예수회들은 중남미의 개종 사역에 있어서 특히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2. 독일의 경건주의
스콜라적 루터교의 발전은 루터가 가르친 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생동적 관계를 경직시켰다. 평신도의 역할은 수동적이었다. 이른바 “죽은 정통”이었다. 경건주의는 이러한 스콜라적 경향에서 벗어났는데, 기독교적 체험과 감정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평신도에게 기독교적 삶의 형성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것을 요구하였고, 세상에 대한 엄격한 금욕 자세를 강조했다. 중심인물은 필립 야곱 슈페너(1635-1705)이다. 그는 요한 아른트의 저작 [진정한 기독교]에 자극을 받았다. 소규모의 경건의 모임에서 경건주의(Pietism)라는 말이 나왔다. 1675년 [경건한 열망]의 저서로 교인에게 경건 생활을 고취시키고, 교회 안의 교회의 회중의 모임을 제안했다. 기독교는 지적 지식이기보다는 오히려 삶이다. 삶에서 드러나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이다. 정상적이라면 그런 생활은 영적 변화 즉 의식적인 중생에서 시작한다. 그는 청교도와 같은 금욕, 절제를 주장했다. 그는 강조점을 신조에서 성서로 옮겼다. 성서와 대중사이의 벽을 허물어 주었고, 성서가 가르치는 궁극적 논리의 형태였던 신앙고백의 기준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그리고 성서 연구의 결과 성서의 본질 및 역사에 대한 연구의 길을 열었다.

3. 영국의 복음주의적 부흥, 웨슬리와 감리교
17세기의 투쟁 상황이 끝났을 때 영국 국교회와 비국교도는 모두 전체적으로 영적 무기력상태에 빠져있었다. 합리주의는 모든 불의의 종교사상에 침투하였다. 그래서 정통신앙 조차도 기독교는 신의 재가를 받아 지탱하는 도덕체계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드디어 심원한 변화가 영국에서 일어났다. 그 변화는 일차적으로 “복음주의적 부흥”의 결과였으며, 이 복된 흐름이 넘쳐흘러 모든 영어 사용권으로 스며들었던 것이다. 존과 찰스 웨슬리 형제의 감리교, 휘트필드의 칼빈주의적 감리교, 영국 국교회 복음주의 교회로 인해 비로소 복음주의 부흥 운동이 거대한 물줄기로 등장했다.
1738년 존 웨슬리는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개최된 국교회의 한 모임에 참석해서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듣게 되어 큰 변화를 체험했다. 웨슬리 형제는 기회가 닿는 대로 설교했다. 1739년 그는 브리스톨에 최초의 진짜 감리교회를 창립했다. 웨슬리는 영국 국교회와 분리할 생각이나 의도가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따로 교회를 설립하지 않았다. 1742년 “속회(Classes)”제도를 만들었는데 이것이야말로 감리교의 고유한 특징이 되었다. 웨슬리 감리교 운동은 엄청나게 성장했다. 동생 찰스는 찬송가 작가로서 감리교뿐만 아니라 영어권 기독교계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웨슬리는 감리교가 국교회 범위 안에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상황은 분리의 압력을 불가항력적으로 만들었다. 1791년 동료들의 국교회 이탈을 반대한 웨슬리가 작고한 후에야 감리교는 국교로부터 분리했다.

4. 대각성 운동
18세기 미국의 종교 생활에서 가장 광범위한 변혁 운동은 대각성 운동이었다. 대각성 운동은 교회에 들어오는 규범적 방법으로 중생의 변화인 “회심”을 강조했다. 엄격한 도덕과 열정적인 경건이 이 운동의 전반적 특징이었다. 대각성 운동은 개신교 사회에 새로운 신앙 이해와 행동원리를 제공함으로써, 개신교가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는데, 기여했으며, 합리적 종교의 도전에 맞서 새롭게 신앙을 변증했다.
대각성의 초기 징조는 1720년대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프렐링후이젠 목사는 교인들에게 보다 깊고 체험적인 기독교 신앙을 권면하였다. 대각성 운동이 뉴잉글랜드에 도착한 것은 1734년에서 1735년까지 부흥 운동이 휩쓸 때였다. 대각성은 또한 남부 식민지로 확산되었고 비국교도 교회의 성장에 공헌했다. 감리교는 독립전쟁 기간 중에도 계속 성장했고, 많은 현지의 평신도 설교자들이 그 운동에 헌신했다.

5. 복음주의적 부흥의 영향과 근대 선교의 발흥
영국의 복음주의적 부흥 운동은 오래된 비국교도파 교회들이 큰 자극을 받았다. 또한 부흥운동은 기독교 문학의 확산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종교소책자협회 등과 같은 기관들로 인해 성경의 대중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성공적인 대규모 기독교 교육사업은 1780년의 주일학교였다. 이것은 국교회 복음주의파 평신도인 로버트 레이크스에 의해 창설되었다.
복음주의적 복음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근대 개신교 선교의 발흥이었다. 종교개혁기의 로마 카톨릭의 선교는 급속하게 발전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개신교는 내부 문제와 오랜 신학적 확신과 아울러 지리적 약점으로 인하여 이에 상응하는 선교의 노력을 기울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17세기 네덜란드의 정복 활동에 따라 실론, 자바, 포르모사에서 선교 사역을 개시했다. 영국의 윌리엄 케리는 지리상의 발전의 자극을 받아 꺼지지 않는 선교적 열정을 보여주었다. 영국의 선교의식이 깊어지자 다른 나라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세기 초 미국과 유럽 대륙에서는 광범위한 교파적, 초교파적 선교회가 설립되었다.

10. 현대교회

1. 에큐메니칼 운동의 성장
에큐메니칼 운동이란 재연합을 향한 운동과 경향 전체를 가리키는 총칭적 용어이다. 역사적 뿌리는 16세기까지 소급되지만, 개신교 삶과 사고의 여섯 영역에서 특별한 운동이 시작된 것은 19세기였고 이것이 20세기 들어와서 범세계적 초교파적 기구로 꽃 피고, 많은 교회의 유기체적인 연합을 자극했던 것이다. 1854년 뉴욕과 런던에서 최초로 범세계적 선교사 대회 열렸고, 1910년 에든버러 세계 선교대회는 에큐메니칼 역사의 큰 전환점이었다. 에든버러의 성과를 보존하기 위해 상임위원회가 설립되었고 다시 이것이 성장하여 1921년 국제 선교협의회로 발전하였다.

2. 현대 카톨릭 교회
요한 23세 교황은 전 세계의 로마 가톨릭 주교들이 모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1962년 10월 11일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열었다. 비카톨릭 세계가 특별한 관심을 가진 것은 `에큐메니즘 교령`이었고 이것은 공식적 전환점을 표시하는 것이었고 로마 가톨릭교회로 하여금 정식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을 향하게 하였고, 신자들에게 에큐메니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당부했다. 이 문서는 그리스도인 사이의 분열은 양쪽 모두의 죄의 결과라고 시인한 후 로마 카톨릭교회 바깥의 교회를 `분리된 교회와 공동체들`이라고 하면서 이들은 교리, 훈련, 구조 등에서 어떤 부족함으로 인해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구원의 신비에 있어서 그 의미와 중요성이 결코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문서에 대한 개신교의 평가는 전반적으로 호의적이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세속사에서도 중요한 사건이다. 그것의 영향은 가톨릭 울타리 안에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곧 체험되기 시작했다. 예전 의식의 개혁은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미사에서 모국어가 대대적으로 사용, 국가의 수직적 계층질서는 여러 단계에서 재조직 되었다.

3. 현대 개신교의 흐름
세계적으로 아주 다른 전통과 다른 유형의 교파들이 자율적 국가적 구조를 가지고 발전하였다. 세상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고 곤경에 처해있고 자기 이익을 대변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에큐메니칼 회의에서 세상과 세상의 문제에 대한 것이 점점 더 관심을 끌었다. 세계교회협의회와 그 회원교회 안에서 세상을 향한 자극과 신학의 영감을 준 것은 주로 디트리히 본회퍼의 미완의 작품이었다. 1966년 교회협의회의 [교회와사회분과]는 `우리시대의 기술과 사회혁명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주제의 제네바 회의를 후원했다. 세상 안에 있는 교회에 대한 가톨릭과 개신교와 정교회의 중요한 관심이 수렴된 것은 1968년의 베이루트 세계개발협력회의였다. 이 회의는 세계 경제, 정치문제의 전문가들을 한데모아 신학적 원리와 일치하는 `개발전략`을 모색했다. 회의연구 결과 그리스도인들은 에큐메니칼 기초위에서 각 지역의 상황에 맞는 방법을 택하고, 정치적으로 적극 활동하도록 촉구되었다. 1968년 스웨덴 웁살라의 세계교회협의회의 제4차 총회는 이러한 경향의 사고와 행동을 계속이어 나갔다.

4. 1970년대의 흐름
전통적으로 성서와 선교와 복음전도를 강조하는 보수적 복음주의적 개신교가 부흥하였다. 보수적 회귀는 오순절교파 특히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오순절 교단의 계속되는 성장에 의해 더 잘 설명되었다. 신오순절운동 혹은 은사운동 또한 역사가 오랜 미국 교회들 특히 감독교회, 루터교, 감리교, 장로교, 로마 가톨릭 안에서 발전하였다. 보수적 복음주의의 부활로 인하여 에큐메니칼 운동권 안에서 선교와 복음전도의 이해와 실천방법에 대한 토론이 많이 진행되었다. 세계교회협의회 제5차 총회는 1975년에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렸는데 해방신학에 많은 관심을 쏠렸다. 1970년대 바티칸과 세계교회협의회 사이에 협조하는 관계가 계속 유지되었으나, 로마 가톨릭이 세계교회협의회의 회원이 될 가능성은 줄어들었다.